
2025년 4월 10일, 한국전쟁 직후 한국에 파견되어 70년 이상 주로 농촌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펼친 프랑스 국적의 두봉 레오나르(Léonard Dubong) 주교가 96세로 선종하셨습니다. 가톨릭 뉴스 보도에 따르면, 두봉 주교는 4월 6일 뇌경색으로 안동병원에서 응급 시술을 받았으나 같은 날 별세하셨습니다.
두봉 주교의 일생은 전후 유럽에서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변화들을 목격하고 참여한 놀라운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신앙, 봉사, 그리고 소외된 공동체를 위한 변함없는 헌신은 한국의 종교적, 인도주의적 노력에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어린 시절과 성소의 발견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중요한 세계적 사건들 속에서 펼쳐졌고, 이러한 경험들이 그의 세계관과 사회적 책임감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21세의 나이에 파리외방전교회(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에 입회한 두봉 주교는 이후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사제직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1953년 6월,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평생의 종교적 봉사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초기 사목활동(1954-1969)
대전에서의 활동
1954년 12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약 1년 후, 두봉 신부는 한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한국에서, 그는 대전대흥동성당에서 10년간 보좌신부로 봉직하며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대전교구 사무처장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역할들은 그가 특별히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후 그의 사목 방향을 형성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온 젊은 사제에게 한국어 습득과 문화적 차이 극복은 분명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봉 신부는 이러한 도전들을 인내와 겸손함으로 극복하며, 한국 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어갔습니다.
안동교구 초대 주교(1969-1990)

역사적인 임명
1969년, 한국에서 15년간의 봉사 끝에, 두봉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설립된 안동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어 약 21년 동안 교구를 이끌었습니다.
안동교구가 위치한 경상북도는 주로 농촌 지역으로, 도시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사목적 도전과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대 주교로서 두봉 주교는 교구의 우선순위, 구조, 사목 방향을 처음부터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가난한 교회"의 비전
두봉 주교는 주교직을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한 교회"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제도적 권위나 물질적 부보다는 소외된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 중점을 두는 접근법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비전은 교구의 자원을 사회 서비스에 집중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불우한 그룹들을 위한 정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필요와 열망을 이해하며,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사역

두봉 주교의 소외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1973년 경상북도 영주에 한센병(Hansen's disease) 환자들을 위한 다미안 의원(Damien Clinic)을 설립한 것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나환자들을 돌본 성 다미안(Saint Damien of Molokai)의 이름을 딴 이 의원은 환자들의 의료적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면한 사회적 낙인도 함께 다루었습니다.
한센병은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종종 심각한 낙인찍기, 가족으로부터의 강제 분리, 격리된 집단 거주지에서의 고립 등을 경험했습니다. 질병 자체도 종종 오해되어,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환자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다미안 의원을 통해 두봉 주교는 치유가 신체적, 사회적 차원 모두를 포괄한다는 그의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질병 자체뿐만 아니라, 종종 의학적 상태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했던 고립과 차별도 함께 다루는 접근법이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설립

1978년 12월,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점점 산업화되는 경제 속에서 농촌 공동체가 직면한 독특한 도전을 인식한 결과였습니다. 이 조직은 교구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 가정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모두 다루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 이니셔티브의 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1970년대 후반은 한국의 경제 발전 정책이 농촌 공동체를 희생시키면서 도시 산업화를 크게 선호했던 시기였습니다. 정부 우선순위는 제조업과 수출에 초점을 맞추었고, 농산물 가격은 도시 소비자와 산업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상당한 농촌-도시 이주, 농업 공동체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전통적인 농촌 문화와 사회 구조의 침식에 기여했습니다. 농민회를 설립함으로써, 두봉 주교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촌 공동체에 제도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농민회는 농업 교육, 협동 마케팅 이니셔티브, 공정한 농업 정책을 위한 옹호 등을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산업적, 기술적 발전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추는 사회에서 농업 노동의 존엄성과 가치를 확인하면서, 신앙과 농촌 생활의 현실을 통합하는 틀을 제공했습니다.
이 조직을 통해, 두봉 주교는 효과적인 사목적 돌봄이 인간 경험의 영적, 물질적 차원 모두를 다루어야 한다는 그의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농민들의 복지가 종교적 지도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제 시스템, 지속 가능한 농업 관행, 그리고 농촌 공동체 생활의 보존에도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한국의 변화를 목격하다
전쟁 복구에서 경제 기적까지
한국에서 70년 이상을 보낸 두봉 주교는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국가 변혁 중 하나를 목격했습니다. 그가 1954년에 도착했을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1인당 GDP가 아프리카의 최빈국들과 비슷했습니다. 그가 선종했을 때인 2025년에는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기술의 선두주자, 그리고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문화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여정—전후의 가난과 고투에서부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운동, 1990년대 후반의 아시아 금융 위기, 그리고 21세기 한국의 완전히 발전된 첨단 기술 사회로의 출현까지—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들 속에서도, 두봉 주교는 급속한 발전 속에서 소외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 속에서도 연민, 정의, 인간 존엄성의 목소리를 일관되게 제공했습니다.
은퇴 후 삶과 유산
주교직 은퇴
약 21년 동안 안동교구를 이끈 후, 두봉 주교는 1990년 12월에 은퇴했습니다. 그러나 주교직에서의 은퇴가 그의 사역이나 한국에서의 활동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적인 봉사 후 자국으로 돌아가는 것과 달리, 두봉 주교는 평생을 바친 공동체를 계속 섬기기 위해 한국에 남기로 선택했습니다.
지속적인 사목적 현존
은퇴 후에도 두봉 주교는 의성의 한 성당에서 소박하게 거주하며 지역 종교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그의 영적 지도를 구하기 위해 특별히 찾아온 방문객들의 고해성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은퇴 후의 지속적인 사역은 한국인들과의 깊은 유대감과 사제직을 단순한 제도적 역할이 아닌 평생의 소명으로 이해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공식적인 책임을 넘어서는 헌신으로, 나이가 들어 신체적 힘이 약해진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중국적: 통합의 상징
2019년, 90세의 나이에 두봉 주교는 특별귀화 대상자로 선정되어 한국과 프랑스의 이중국적자가 되었습니다. 이 형식적인 인정은 60년 이상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헌신과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그의 통합을 상징합니다.
이중국적 취득은 한국 정부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가에 대한 그의 놀라운 공헌을 인정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한국을 그의 제2의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신의 마음가짐을 반영합니다.
신앙과 봉사의 삶

96세로 선종한 두봉 레오나르 주교의 선종은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놀라운 한 장이 마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부터 현대 한국의 기술적 정교함에 이르기까지, 그의 71년간의 헌신적인 봉사는 한국 사회의 전례 없는 변화의 시기를 아우릅니다.
이 여정 내내, 그는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고, 정의를 옹호하며, 신앙과 연민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변함없는 헌신을 유지했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다미안 의원과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설립은 취약한 인구들에게 계속해서 혜택을 주는 지속적인 제도적 유산을 대표합니다.
이러한 가시적인 업적을 넘어, 두봉 주교의 가장 큰 유산은 그의 사역으로 인해 삶이 변화된 수많은 개인들일 것입니다—돌봄과 존엄성을 받은 환자들, 옹호와 지원을 찾은 농부들, 신앙 여정에서 인도받은 신자들, 그리고 봉사에 헌신된 삶을 목격한 더 넓은 공동체들.
두봉 주교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목적과 연민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이 세대와 문화를 넘어 가질 수 있는 깊은 영향력을 상기하게 됩니다. 젊은 프랑스 사제에서 사랑받는 한국 시민이 된 그의 여정은 국경을 초월하는 신앙, 봉사, 인간 존엄성의 보편적 가치를 체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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